전남 순천, 시간 위에 피어나는 기억과 자연의 노래
1. 순천이 특별한 이유
도시마다 저마다의 향기가 있습니다. 서울은 빠르게 변하는 빛과 속도의 향기를, 부산은 바다와 항구의 거친 바람을 품고 있지요. 그런데 순천은 조금 다릅니다. 이곳은 사람의 손길이 닿았으면서도 자연의 숨결을 잃지 않은 도시이고, 시간이 흘러도 그 흔적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곳입니다. 순천만 국가정원과 순천만 습지는 여전히 바람과 물새의 언어로 속삭이고, 드라마 세트장은 우리 부모님, 혹은 어린 날의 나를 다시 만나게 해줍니다. 그래서 순천은 단순한 여행지가 아니라, 시간을 거슬러 오르고 또 흐름에 몸을 맡기는 여행의 무대였습니다.
2. 순천에서 보낸 하루
① 드라마 세트장 – 과거로 들어가는 문
순천 드라마 세트장의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마음이 묘하게 떨렸습니다. 낮은 지붕의 기와집과 오래된 간판, 색이 바랜 벽돌 건물들이 눈앞에 펼쳐졌는데, 그것은 단순한 세트가 아니라 오래된 사진첩 속으로 걸어 들어간 듯한 풍경이었습니다.
구멍가게 앞에 놓인 유리병 사이다, ‘ㅇㅇ다방’이라고 쓰인 간판, 그리고 붉은 공중전화 박스 하나가 저를 붙잡았습니다. 수화기를 들고 ‘여보세요’라고 속삭이면, 금방이라도 누군가 그 시절의 목소리로 대답할 것 같았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곳은 많은 드라마의 배경이 되었지만 정작 저는 드라마보다 제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골목을 걸었습니다. 골목마다 묻어 있는 시간의 결이 발걸음을 천천히 만들었고, 낡은 간판마다 사연이 숨어 있는 듯했습니다.
② 추억의 골목에서 만난 따뜻한 순간
세트장 한쪽에 자리한 작은 교실 안에 들어갔습니다. 나무 책상에 손을 얹자, 오래된 분필 가루와 연필 냄새가 코끝에 스쳤습니다. 창문 너머로 부드럽게 들어오는 햇살은 마치 어린 시절의 기억을 깨우는 듯 따스했습니다.
교실을 나오니, 골목 한쪽에서 아이들이 달고나를 들고 즐겁게 웃고 있었습니다. 부모님은 ‘우리 때는 말이야’라며 옛이야기를 들려주고, 아이들은 눈을 반짝이며 그 시절을 상상하는 모습이 너무도 정겨웠습니다. 이 순간, 세트장은 단순히 과거를 재현하는 공간이 아니라, 세대를 이어주는 다리가 되어 있음을 느꼈습니다.
세트장 안쪽으로 더 들어가니 오래된 포스터와 벽보가 곳곳에 붙어 있었고, 오래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트로트 음악이 풍경을 완성했습니다. 바람이 간간히 불어오자 낡은 커튼이 펄럭이며 또 하나의 장면을 만들어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추억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언제든 다시 살아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③ 순천만 국가정원 – 꽃과 바람이 노래하는 곳
드라마 세트장에서 나와 차를 타고 조금 달리니, 순천만 국가정원이 펼쳐졌습니다. 입구에 들어서자 넓고 푸른 길 위로 꽃잎이 바람에 실려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각국의 정원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이곳은, 그 자체로 세계 여행을 하는 듯한 설렘을 선물했습니다.
한국 정원은 단아했고, 일본 정원은 고요했으며, 네덜란드 정원은 화려한 튤립으로 웃음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길 위를 걷는 제 발걸음은 어느새 한 폭의 그림 속 인물이 된 듯 가벼웠습니다.
국제습지센터 전망대에 올랐을 때, 한눈에 들어온 정원은 거대한 캔버스 같았습니다. 햇살은 초록빛 나무 사이사이에 금실처럼 내려앉았고, 가을바람은 꽃잎 사이를 부드럽게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 풍경 속에서 저는 문득 ‘사람의 손길과 자연의 호흡이 이렇게도 아름답게 어울릴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특히 계절이 바뀔 때마다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이곳은 단 한 번의 여행으로는 다 담을 수 없는 장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봄에는 벚꽃이, 여름에는 푸른 나무와 장미가, 가을에는 국화와 코스모스가, 겨울에는 설경이 같은 자리에 서서도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줄 테니까요.
④ 순천만 습지 – 갈대밭 위로 내려앉은 노을
국가정원에서 이어진 길을 따라, 저는 순천만 습지로 향했습니다. 바람에 따라 파도처럼 흔들리는 은빛 갈대밭이 저를 맞이했습니다. 멀리서 들려오는 새들의 울음소리는 배경 음악 같았고, 그 위로 불어오는 바람은 마음속 먼지를 차분히 씻어내렸습니다.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건 일몰이었습니다. 전망대에 서자, 붉게 물든 하늘이 갈대밭 위로 천천히 내려앉았습니다. 하늘과 땅, 그리고 바다가 하나로 이어지는 순간, 숨조차 멈추고 그 장면에 온몸을 맡기게 되었습니다. 갈대밭 사이로 철새들이 떼 지어 날아오르는 풍경은 그야말로 순천만이 주는 선물이었습니다.
그 풍경을 바라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늘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 살고 있지만, 순천만의 갈대는 바람을 타고 흔들리면서도 그 자리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흔들려도 꺾이지 않고, 계절이 바뀌어도 다시 싹을 틔우는 갈대처럼, 여행자의 마음도 그 순간 단단해지는 듯했습니다.
3. 순천 여행을 더 깊게 즐기는 방법
동선 추천 : 드라마 세트장에서 과거를 거닐다 → 순천만 국가정원에서 현재를 즐기고 → 순천만 습지에서 영원의 풍경을 만나다.
포토스팟 : 교실 창가, 다방 앞 간판, 국제습지센터 전망대, 갈대밭 위의 일몰.
체험 : 달고나 만들기, 정원 속 팝업 전시, 습지 생태 해설.
팁 : 아침은 드라마 세트장에서, 낮에는 국가정원, 저녁은 순천만 습지 일몰. 하루에 세 가지 시간을 모두 담을 수 있습니다.
4. 과거와 현재, 그리고 나
순천에서의 하루는 단순한 관광이 아니었습니다. 드라마 세트장에서 만난 것은 과거였지만, 사실은 제 마음속에 잠들어 있던 기억이었고, 순천만 국가정원과 습지에서 만난 풍경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품은 자연의 약속 같았습니다.
돌아오는 길,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갈대와 붉은 하늘은 오래도록 제 마음에 남았습니다. 순천은 ‘다시 가고 싶은 곳’이 아니라, ‘다시 불러내는 곳’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늘 같은 자리에서, 또 다른 시간의 문을 열어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