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양림동, 50년 된 다방에서 듣는 이야기
1. 양림동, 시간을 걷는 골목
광주의 양림동은 낯설면서도 묘한 친근함을 주는 동네다. 흔히 ‘예술과 역사 마을’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일제강점기 때 서양 선교사들이 남긴 근대식 건축물과 오래된 한옥들이 공존하는 특별한 공간이다. 골목마다 개성 있는 벽화와 갤러리, 작은 공연장이 자리해 있어 ‘살아 있는 박물관’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낮에는 관광객이 몰려와 카페와 문화 공간을 즐기고, 저녁이 되면 조용한 정적이 골목을 감싼다. 이곳을 찾는 이유는 단순히 ‘볼거리’ 때문만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이 켜켜이 쌓인 결을 직접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날도 나는 양림동 골목을 천천히 걸었다. 가로등 불빛이 벽돌 담장 위에 길게 드리워지고, 간간히 들려오는 버스킹 소리가 바람에 섞여 흘렀다. 그 순간, 오래된 네온사인이 내 눈길을 붙잡았다. 빛이 바래 희미하게 깜빡이는 간판 위에는 ‘○○다방’이라는 글씨가 걸려 있었다. 지금은 보기 힘든 글씨체였고, 그 자체로 세월의 흔적을 증명하는 듯했다. 호기심에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마치 다른 시대의 공간으로 발을 들인 듯한 기분이 몰려왔다.
2. 다방 내부, 세월을 담은 무대
문을 닫는 순간, 바깥의 소란스러움은 사라지고 낯선 정적과 함께 묘한 온기가 느껴졌다. 실내는 1970년대식 원목 테이블과 붉은 벨벳 의자로 가득 차 있었다. 테이블마다 묵직한 재떨이가 놓여 있었고, 벽에는 바랜 영화 포스터가 걸려 있었다. 메뉴판에는 ‘다방 커피’, ‘레몬티’, ‘코코아’ 같은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요즘 카페에서 흔히 보는 라떼나 아메리카노는 없었다. 오히려 낯설게 느껴지는 이 단어들이야말로 다방이 여전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증거 같았다.
천장에는 작은 샹들리에가 걸려 있었고, 빛바랜 전구는 공간을 노랗게 물들였다. 코끝에 닿는 커피 향은 세련되진 않았지만 진하고 꾸밈이 없었다. 오래된 스피커에서는 가느다란 잡음이 섞인 올드 팝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그 멜로디가 공간 전체에 부드럽게 깔리며 낡은 의자와 벽을 하나로 묶어주고 있었다.
3. 주인장의 이야기
창가 자리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르자, 연세 지긋한 주인장이 다가왔다. 반백의 머리, 단정한 셔츠, 그리고 친근한 미소. 그는 내게 다방의 대표 메뉴인 ‘다방 커피’를 권했다. 프리마와 설탕이 듬뿍 들어간 달콤쌉싸름한 커피. 요즘 입맛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이 공간에서는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치 이 한 잔이 수십 년간 이 다방을 지탱해온 작은 축처럼 느껴졌다.
커피를 내려놓으며 그는 말했다.
“이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참 많았지요. 대학생도, 직장인도, 연인도, 시인도…”
그의 말은 단순한 소개가 아니라, 긴 이야기의 초대장이었다. 그는 다방의 시간을 조각조각 꺼내 보여주었다.
1970년대에는 대학생들이 기타를 메고 이곳에 모여 사회 문제를 토론했다고 한다. 책을 펼쳐놓고 시를 읽고, 작은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며 밤을 새우기도 했다. 1980년대에는 민주화 바람 속에서 청년들이 모여 미래를 이야기했고, IMF 시절에는 일자리를 잃은 이들이 서로의 상처를 달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어떤 연인은 이곳에서 처음 만나 사랑을 키웠고, 또 다른 이들은 마지막 이별을 고했다.
“여기 테이블 하나하나에 다 이야기가 담겨 있어요. 커피 얼룩도, 낡은 흠집도 다 추억이지요.”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오래 버텨온 공간이 가진 무게감이 묻어 있었다.
4. 손님들의 이야기, 다방이 품은 사람들
커피를 마시는 동안, 몇 명의 손님이 차례로 들어왔다. 대부분 머리가 희끗한 어르신들이었는데, 들어서자마자 주인장과 자연스럽게 안부를 나눴다. 오랜 벗을 만난 듯한 따뜻한 분위기였다.
한 노신사는 젊은 시절 이곳에서 직장 동료들과 회식을 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웃으며 “그때는 술 대신 다방 커피로 밤을 지새웠다네”라고 회상했다. 또 다른 이는 학창 시절 시험이 끝나면 이 다방에서 친구들과 팝송을 들으며 해방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니, 다방은 단순히 음료를 파는 곳이 아니라, 삶의 희로애락을 함께 겪어낸 공간임이 분명했다. 기쁨과 슬픔, 설렘과 상처, 모든 감정이 이곳의 공기 속에 스며 있었다.
나는 문득 생각했다. 오늘날의 카페는 사진 찍기 좋은 인테리어나 트렌디한 메뉴로 사람들을 모으지만, 진짜 이야기를 품은 곳은 얼마나 될까? 이곳 다방처럼 수십 년간 사람들의 마음을 묵묵히 받아주고, 또 그 흔적을 남기는 장소는 드물 것이다.
5. 도시와 함께 늙어가는 다방
주인장은 양림동의 변화를 조용히 회상했다. 오래된 건물들이 허물어지고, 새 건물이 들어서며 골목은 점점 밝아졌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낡은 가게들은 하나둘 사라졌다. 동네의 얼굴이 바뀌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는 이 다방만큼은 끝까지 지키고 싶었다고 했다.
“이제는 이런 다방이 거의 없지요. 하지만 누군가는 기억을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의 말은 단순한 고집이 아니라, 한 도시의 정체성을 잇는 끈 같은 다짐이었다.
6. 여행자의 성찰, 느림의 가치
밤이 깊어갈수록 다방 안은 더욱 차분해졌다. 창밖 가로등 불빛이 커튼 사이로 스며들고, 잔잔한 음악은 마음속 깊은 곳까지 울렸다. 나는 마지막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생각했다. 여행의 본질은 새로운 곳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오래된 공간에서 ‘듣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양림동 다방에서의 시간은 단순한 관광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 도시의 역사와 사람들의 목소리를 직접 만나는 일이었다. 화려하지 않은 공간, 투박한 커피잔, 그리고 오래된 이야기들 속에서 나는 오히려 더 큰 울림을 느꼈다.
다방을 나서자 간판 불빛이 은은히 흔들렸다. 그 불빛은 마치 ‘다시 오라’는 초대장처럼 보였다. 골목길을 걸어 내려오면서 나는 스스로에게 약속했다. 앞으로의 여행에서는 유명한 명소보다 이런 오래된 공간을 먼저 찾겠다고. 결국 여행의 가치는 사진이 아니라, 그곳에서 만난 사람과 이야기 속에 있다는 걸 이 다방이 알려주었기 때문이다.